NO 무현? 노무현! (1)

  

은퇴를 하고 난 뒤에도 이렇게 많이 회자되는 대통령이 또 있을까?

 역시나 측근에 대한 비리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일까? 전임 대통령의 측근 비리로 온 세상이 소란스럽다. 그마저 그럴 줄은 몰랐다는 배신감 섞인 목소리부터 한국정치에서 어쩔 수 없는가라는 자조섞인 목소리까지 그러나 대다수를 이루는 그럴줄 알았다는, 너도 별 수 없다는 비판 적인 목소리일 것이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만큼 재임기간 동안 온 국민에게 욕을 먹은 대통령은 많지 않다. 전통적인 지지층으로부터는 '배신자'란 오명에서부터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믿을 수 없다'는  비난까지 온 국민에게 대통령 욕하기란 신종 스포츠를 만들어 냈을 정도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렇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을까? 과연 이렇게 까지 비판받아 마땅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좀 더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지난 정부의 업적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장점은 칭찬하고 과오는 실랄하게 비판함으로 더 나은 한국을 만들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 보는 것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책을 크게 5가지 분야로 나누어서 조망해 보겠다.

 1. 거시경제정책

 먼저 아시아의 대표적 고성장 국가였던 four tigers들의 gdp성장률을 보자. 싱가포르나 홍콩이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간 반면 한국은 대만에 비해서만 다소 높은 성장률을 유지했을 뿐 전반적으로 경쟁국보다 낮은 성장률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세를 단순히 노무현 정부의 과오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시기에, KDI, 한국은행 등 주요 국책 기관들이 발표한 대한민국의 잠재 GDP 성장률은 4.5-5.0%였다. 즉, 당시 노무현 정부는 경기의 추가적인 과열 없이 견조한 성장세를 유지한 것이다. 이러한 증거는 각국의 실업률 조사에서도 나타난다. 같은 기간 한국의 실업률은 NAIRU라고 불려지는 4%를 하회하고 있으며 이러한 수치는 다른 경쟁국에 비해 비교적 낮은 수치이다. 

물론 직업의 질에 관한 논란의 여지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싱가포르와 홍콩이 금융업을 중심으로한 서비스업이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점, 두 국가 모두 관광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음을 상기해 보면 우리의 서비스업 취업의 비중 상승, 비정규직의 상승이 다른 경쟁국에 비해 훨씬 상황이 악화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간 한국은 건실한 성장을 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참여정부는 그간 잠재성장률을 상승시키기 위해, 즉 지속적인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성공여부를 떠나) 많은 노력을 했다. BK21이나, NURI 등의 정부의 적극적인 R&D 정책등을 펼침으로 기술진보를 통한 성장을 추구하였다. 다만, 경제가 그간 중공업의 산업구조에서 지식산업으로의 이행이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발생한 많은 문제점, 가령 구조적 실업의 증가, 지식산업 고유의 특징인 빈부의 격차 확대 등은 정부가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추구하며 생긴 필수 불가결한 부정적 산물이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듯 완벽하진 않지만 비교적 문안한 경제성장을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경제정책이 비판 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과거에 대한 향수이다. 과거 정부의 고성장 정책으로 7-8%의 성장이 익숙한 우리에게 특히 아버지 세대에게 있어 4-5%의 성장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과거 노동과 자본으로 성장하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체계에 있다. 이제 우리도 기술진보에 의해 성장하는 저물가 저성장 체제에 접어들었다. 

결론적으로 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이 성장측면에서 볼때, 혹은 기술진보를 위한 투자가 명확히 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실패한 경제정책으로 까지 매도당하는 것은 과도하다. 

2. 소득분배정책 

 아마 이 부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나뉘며, 비판 또한 가장 거셀 것이다. 한 쪽에서는 너무 무리하게 분배를 시행하다가 성장 동력을 일었다는 주장과 기대와는 달리 너무 성장에 치우쳐 생각만큼의 분배를 이루지 못했다는 다른 한쪽의 비판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여러가지 분배구조를 나타내는 지표중 하나인 노동소득분배율을 살펴보자. 아래 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과거 김대중정부때 60%를 하회하던 노동소득분배율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이후 꾸준히 상승, 2007년에는 61%에 근접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그래프를 더 보자. 두번째 그래프는 국민총처분가능소득 중 피용자보수의 비율과 기업 및 재산소득의 비율이다. 이 그래프에서 보면 피용자보수는 점진적으로 증가추세에 있는 반면 재산소득의 비율은 완만하게 하락하는 추세임을 알 수 있다.  즉 총 생산에서 노동자의 몫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소득 분배에 노력한 흔적은 각종 정책에서도 쉽게 나타난다. 가장 확실한 예는 어린이집 교사에 대한 정부의 소득 보전 지원 정책이다. 이 정책의 요지는 어린이집 교사에게 고별로 10-20만원 정도를 지원, 단위 비용을 낮춰 여성들의 노동을 용이하게 하는 동시에 비교적 낮은 보수를 받고 있는 어린이집 교사에 대한 처우도 개선하는 것이다. 이 정책의 효과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나타났다. 유치원이 주류를 이루었던 기존의 유아 교육 시장에 어린이집(탁아소 포함)이 등장 낮은 비용을 무기로 급속하게 시장을 점유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책을 사용함에 따라 일반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세금또한 증가했으나, 일반적으로 노무현 정권이 시장경제만 외치다 복지는 외면했다는 일부 지지층의 주장은 다소 거리가 있는것이 사실이다.

-3부터는 to be continued-

by 꿈꾸는소년 | 2008/12/29 17:02 | 트랙백 | 덧글(1)

YESMAN



1. NO! MAN.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놀것같은 휴일의 저녁, 비디오를 빌리는 행렬이 길게 늘어진 줄이 처량하게 보일 무렵 익숙한 한 남자가 그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짐캐리의 기존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어두운 배경으로 처리된 ‘YESMAN’의 도입부는 화면의 이미지에서 보듯 'YES'가 아닌 'NO'에 가깝다. 즉, 우리가 처음에 마주하는 짐캐리의 모습은 우리가 기대했던 웃는 YES가 아닌 언제나 NO를 연발하는 매사가 부정적일 뿐 아니라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하는 외톨이 이다. (심지어 스스로가 원하기까지!!) 이런 짐캐리 또한 자신의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기 시작한다. 우연히 만난 옛친구의 권유로 YESMAN을 권하는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처음엔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짐케리는 결국 강사의 강권으로 YESMAN이 되기로 결심한다.

YESMAN이 되길 강요하는 사회자와 짐캐리의 모습

2. YESMAN?

 이후 짐캐리는 자신과 무조건 YES라고 말하기를 결심한다. 노숙자가 차를 태워 달라고 해도, 돈을 빌려 달라고 해도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미련스럽게 YES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련한 YES가 행운을 불러올 줄이야!

짐캐리와 여자친구~ 귀엽다 

강사가 말한것처럼 정말 거짓말같이 YES라고 말한 이후, 짐캐리에게 놀라운 변화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여자친구가 생기고, 승진을 하며, 심지어 자살하려는 사람까지 막는 시민 영웅까지!! 그러나 그는 아직 진정한 YESMAN의 의미를 몰랐다. 그는  무엇이든 짐심을 다해 YES를 하고 때론 NO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YES인줄 알았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여자친구에게 들통나고 말고 이런 그에게 상처받은여자친구는 이별을 통보하게 된다.
 
 3. YESMAN!

 결국 그는 YESMAN의 참 의미를 알게되고 그의 사랑이 받아들여지면서 영화는 끝을 맺게 된다. 짐캐리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영화는 적절한 이벤트가 잘 버무려져 시종일관 유쾌함을 견지한다. 이런 짐캐리의 영화는 심각한 사회적 고발이나 은유를 찾아볼 수 없는 잘 만들어진 가족 코미디 영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주는 즐거움이 단순히 짐캐리식 웃음코드만이 아님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YES라는 마인드이기 때문이 아닐까?

 다른 어느 영화보다 짐캐리의 YES라는 한마디가 여운이 남는 따뜻한 영화였다.

by 꿈꾸는소년 | 2008/12/23 17:27 | Daily | 트랙백 | 덧글(0)

금리 인하가 만능인가?

 
 
    결국 파격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한 금융위원회

 한국은행이 드디어 파격적인 금리인하를 시작했다. 그간, 시장의 다소 보수적인 비판에 시달렸던 한국은행이 드디어 돈줄을 푼것이다. 일단 시장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그간 금리를 내리고, 지준율을 내리는 등 의 온갖 수단을 간구해도 반응하지 않던 시장이 점차 반응하기 시작했다. 금리 인하에도 꿈쩍 않던 CD금리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금리인하 효과는 신용물 시장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국고채 금리가 35bp 내려가는데 그친데 반해 회사채 금리는 90bp에 육박하는 낙폭을 기록 중이다(AA-등급 기준).  이를 바탕으로 당국은 소비심리를 살려, 세계 경제 침체기에 국가 경제를 landing slide하겠다는 심산일게다. 그러나 이는 이는 강만수를 비롯한 재경부 인사가 폁친 정책 실수로 인한 추가 비용일 뿐 아니라 향후, 우리 경제가 바라는 유동성 개선 및 환율 안정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금리 인하는 향후 인플레이션 유발이라는 시한폭탄만을 안게 되었다. 

원인은 다른데 있다?

 그간 금리를 인하해도 시중 유동성이 확대되지 않은 데에는 금리 인하 덕분이 아니였다. 금리의 원인은 세계 경기가 침체되기 시작하면서 일부 중소기업의 연체율이 높아지고 시장의 VaR또한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위기를 느낀 금융기관이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negative wealth effect가 발생하면서 PF등을 통해 금융기관이 마구잡이로 대출했던 건설사 및 중소 선박회사가 연체 회사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은행들의 체감경기의 둔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건설 및 조선은 경기와 밀접한 관계) 

 뿐만 아니라 정부의 혼선적인 정책도 한 몫을 거들었다. 금융기관장 회의를 통해 " 금융기관이 무분별한 대출을 통해 덩치키우기만 집착해서 금리가 BIS 비율도 못지키는 등 국제시장의 기준도 못지키는 한심한 지경이다."라는 등의 강력한 비판을 하는가 하면 "중소기업 대출을 당부드린다."는 등의 서로 상반되는 지시를 내림으로 시장이 혼선을 일으킨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강만수 경제팀은 시장의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한국은행과의 반목만 키워 리더쉽의 상실을 야기. 시장의 불신을 키운 것이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강만수 경제팀이 초기부터 펼처왔던 정책이 바로 환율 정책이다. 과거 한국은행의 smoothing operation과 비교하여 봤을때 훨씬 더 개입 의지를 피력한 -마치 firty floating system을 보는것 같았던- 환율정책으로 인해 이미 당국은 신뢰를 잃었는데, 또다시 금리를 인하했다는 것은 정부가 경기를 부양함과 동시에 원화의 절하를 지켜보겠다는 심산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최근의 스왑으로 인해 환율 안정을 위해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아졌기는 하지만 스왑으로 들어가는 비용또한 국민의 세금임을 감안함과 더불어 결국 환율이란 IRP에 의해서 반응한다고 가정했을 때 장기적으로 원화의 절하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취임 초기와의 정책과는 대조적인 것으로 또다시 강만수 경제팀이 시장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치명적이다.

 또한, 금리 인하및 금융권의 20조원의 자금 확충은 전형적인 Moral Hazard를 발생 시킬 수 있다라는 점에서 신중, 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물론 한국이 미국의 IB와 같이 Leverage 비율이 30에 가까울정도(은행은 15)로 높진 않았으나 한국 금융기관의 평균레버리지는 19-20정도로 미국의 그것보다는 매우 높다. 이는 2000년 이후 은행이 합병 등을 거치면서 외연 성장에 주력, 2001-2003년의 주택담보 대출에 이어 2006-2007년의 중소기업 대출 등, 무분별한 대출이 현 상황을 야기한 원인이다. 따라서 정부는 힘들긴 하겠지만 그 책임을 충분히 물어서 향후, 미국의 LMTC나 영국의 노던 록 같은 사태가 우리에게 발생하지 않도록 모니터링 강화에 힘써야 한다. 


강만수 경제장관   


 물가는 어쩔것인가?

 최근 유가가 하락 안정세를 보이면서 물가에 대한 걱정은 우리의 뇌리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인다. 그렇다고 해서 공격적인 금리인하의 당위성을 확보한 것은 아니다. 우선 금리 인하가 시장에 시차 없이 바로 영향을 끼치는 경로는 기대 경로일 뿐 다른 자간가격, 환율, 금리 등의 경로는 6개월-1년사이의 시차를 두고 발생하기 시작한다. 즉 6개월 후 만약 세계 경제가 본격적으로 선순환의 사이클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우린 다시 엄청난 물가의 압력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앙은행은 금리 인하는 정말 최후의 카드로 baby step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 하며, 그 외의 다른 방안을 간구하는 것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이명박은 대통령이고 그는 경제 부처의 수장이다. 우리는 그가 정말 잘 되길 바래야 한다. 나또한 그러길 바란다. 제발...

by 꿈꾸는소년 | 2008/12/21 20:44 | Economics | 트랙백 | 덧글(0)

대한민국에서 토론은 아직 멀었다.


 시사토론 프로그램을 즐겨보진 않는다. 시간도 너무 늦게 하거니와, 토론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목소리만 높이는 일부 논객들의 행태도 곱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런 사람들보다야 내가..'라는 교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논객 개개인의 지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당시 사회에서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사안에 대해 대립하고 있는 두 진영의 논쟁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이런 태생적 한계에 기인한 토론답지 못한 토론 프로그램이 즐비한 상황에서도 100분토론은 나에게 많은 유희를 주었고 이번, 특집은 말 그대로 '특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사회자 손석희(손간지?)의 매끄러운 진행은 여전했으며, 진보 논객들은 과연 당대 최고의 진용 답게 화려한 레토릭을 구사하는 진중권교수와 예전의 날카로움은 무뎌졌다고 하나 핵심을 집어내는 말과 적절한 어휘, 은유까지 사용하는 유시민 전 장관은 여전히 명불허전이였다. 물론 보수진영의 전원책 변호사 또한 '전거성'답게 소위 '팀킬'까지 해가며 기존의 보수와 선을 그으면서도 명확한 논리와 근거로 진보진영에 대항했다. 물론 김제동, 신해철 또한 PD의 의도대로 적절한 양념을 더해 토론을 한층 맛갈나게 했음은 물론이다. 

 9명의 토론들 중 토론을 가장 잘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어제, 오늘 각종 인터넷 게시판은 이와 관련된 이야기로 식을 줄 몰랐다. 진중권 교수의 비유에 의한 사회적 담론을 담아내는 능력이나, 전원책 변호사의 일관된 논리에 의한 주장을 들며 소위 '평점주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방송으로 잠시 귀환한 '유시민'에게 최고라는 단어를 헌사하고 싶다. 인파이터의 모습으로 신랄한 비판을 서슴치 않고, 진중권 교수와 같이 상대방을 깔보는 듯한 비웃음, 해학 등을 섞어가며 결국 한 방의 논리로 사람을 보내버리는 과거의 모습을 원했던 시청자들에겐 상당한 실망이었겠지만, 나에게는 변한 그를 보는 것또한 상당한 즐거움이였다. 

 확실히 그는 변해있었다. 자숙의 기간이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고, 일정한 톤으로 상대방의 논거를 반박 혹은 들어내는 그는 훨씬더 커져 있었다. 


 오바마 필이 난다고 할까? 이런 모습이 잘 어울린다. (경북대 강의 중)

 
그러나 나에게 또 한명의 달변가인 진중권 교수는 아쉬운 부분이 많이 있었다. 물론 그는 확실이 '인텔리'이다. 그가 쓴 '미학오딧세이'를 읽어도 그렇고 그의 홈페이지에 있는 글들을 봐도 그의 지적 능력은 대한민국의 좌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라 칭하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자세이다. 그는 토론에서 약간 몸을 돌린 자세로 오른 손으로 왼손을 붙잡는, 그러나 팔짱은 끼지 않은 채로 약간 아래로 사람을 굽어보듯 응시한다. 이는 상대방에게 굉장한 불쾌감을 야기하며, 이는 '합의에 의한 더 나은 방안 모색'이라는 토론의 기본 전제에도 어긋난다. 화려한 레토릭의 달인인 그에게 필요한건 다름 아닌 기본이다.

 
지식에 비해 태도가 1% 모자란 진중권교수. 태도의 변화가 요구된다. 

 한편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보수 진영의 최고의 토론자는 단연 전원책 변호사였다. 최강의 투톱라인과 강력한 미드필드진으로 구성된 진보진영을 호되게 질책 하기도 하면서, 때론 보수진영의 동료까지 묻어버리는 그의 말엔 분명 강한 힘과 일관된 논리가 느껴진다. "저는 김정일이가 죽지 않은게 가장 아쉽습니다. 지금 대한 민국의 3대 불안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씀 하시면 안되죠. 퍼주다 이렇게 된건데..."라고 말하는 그의 주장은 분명 다른 보수들과는 달랐다. 또한 SOC건설에 대해서 비판하는 진중권 교수에세 "SOC가 사회 유발 효과가 큰건 사실입니다. 그러니 정비 해야 할 곳 많습니다. 그러니까 대운하 할생각은 마시고 어서 대통령께서 SOC 정비 하셔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부분에선 진중권 교수를 공격하면서, 같은편 나경원 의원까지 보내버리는 이른바 '1타 2득'까지 보여주었다. 다만 좀 아쉬웠던 것은 차분하지 못한 어조였는데, 그정도는 충분히 애교(?)로 넘어 가 줄 수 있는 사안이였다. 왜냐하면, 그를 제외한 보수진영은 과연 이들이 선택된 논객들이 맞나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인데 그중 제성호 중앙대 교수와 이승환 변호사는 글이 아까울 정도 였다.

 다시 진보 진영으로 돌아와 신해철, 김제동에 대해서도 논해보고자 한다. 신해철은 PD들이 기대한 대로 여러 가지 어록들을 양산하며, 100분토론의 시청률 상승을 견인했다. 특히, '악플로 인한 영생의 길', '국회는 청소년 유해물, 19금'등은 제도권 인사들은 하지 못하느 그만이 갖고 있는 스페셜티였다. 반면 김제동은 약간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당초 출연을 고사했으나 손석희 교수의 삼고초려로 출연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시종일관 상당히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간간히 '이념 논쟁 이젠 지겹습니다.'. 'IT에도 사람의 마음이 담길 수 있습니다.'등의 어록들을 양상하긴 했으나, 자신의 견해를 뚜렷하게 주장하지 못해 시청자들의 아쉬움을 자아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청자들 또한 그의 상황과 처지를 알기에 비판보다는 많은 격려를 인터넷 상에서 하고 있다

 

 2시간여의 토론이 참 짧게 느껴졌다. 좀 더 했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았다. 진행자 손석희는 클로징 멘트는 "토론을 통해서 민주주의도 발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였다. 정말 그럴까. 회의하지 않을 수 없는 물음이다. 

 

by 꿈꾸는소년 | 2008/12/21 02:04 | Daily | 트랙백 | 덧글(0)

괴물 새롭게 해석하기(2008)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향해◀

- ‘괴물’(2006) 새롭게 해석하기 -




                                                             

1. 괴물의 이중적(二重的) 의미


 어두운 회색 톤을 배경으로 미군부대에서 포름알데히드를 버리는 등, 일련의 괴물의 등장을 설명하는 신들이 지나면, 돌연 태평스럽게 낮잠을 자고 있는 강두(송강호 님)가 나타난다. 전과는 사뭇 다른 밝은 배경으로 처리된 ‘괴물’의 인상 깊은 도입부는 폭풍전야(暴風前夜)의 고요함 속에 그들의 즐거운 한 때를 의미할 터이다. 이는 인간의 방종(放縱)이 다시 평범한 한 가정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알리는 알레고리임에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괴물’은 영화에 나오는 괴물 그 자체라기보다 인간의 욕망이 만든 과오의 결정체인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주지하는바와 같이 괴물을 처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강 매점에서 오징어를 굽고, 컵라면을 팔던 평범한 가족에게는 어쩌면 실현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회적 통념상 괴물에 맞서야 할 ‘젊은 남자’들의 무능력한 면이 부각되는데, 주인공인 강두는 아버지인 희봉(변희봉 님)에 얹혀살며 매점 운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회적 무능력자이고, 동생 남일(박해일 님) 또한 학생운동이라는 과거 전력으로 인해 취업조차 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요컨대 ‘괴물’에 나오는 가족의 구조는 현서(고아성 님)가 괴물에게 잡혀가는 문제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무력하기 때문에 더욱 국가적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국가는 어떠했는가? 국가는 현서를 구하는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이들을 환자취급을 하고, 나중에는 피해 및 과실을 축소하기에만 급급해 한다. 마치 ‘공공의 선을 이루기 위해 개인의 행복은 무시되어도 좋다’는 전체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 같다. 국가의 잔인성을 연상시키는 이후의 어두운 장면들은 강두의 한심스럽기까지 한 순수성에 대비되어 더욱 서늘해진다. 특히 강두가 병원에서 “사망자인데요, 사망은 안했어요.”라고 말하자 공권력으로 상징되는 경찰이 계속해서 무시되는 장면은 개인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개인을 억압하는 괴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영화에서 괴물은 인간이 만든 환경오염의 재앙일 뿐 아니라 개인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개인을 억압하는 괴물로 변할 수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2.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가져오는 불행


 도날드 하사관이 죽은 뒤 부검에서 아무 바이러스가 검사 되지 않은 장면을 떠올려 보자. 미군의 군의관이 강두의 딸이 살아있다는 말을 듣자, 왜 국가나 인권단체에 말을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그때 강두가 하는 말은 그 유명한 “아무도 내말을 안 들어줘. 제발 내말 좀   끊지마. 내말도 말인데, 왜 내 말을 안 들어줘.”이다. 이 짧은 대사 속에는 사회 전체의 행복추구의 과정 속에 경시되어 온 소수자의 절규가 담겨있다. 게다가 검사관은 바이러스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할 때의 사회적 혼란을 고려 뇌 검사를 하고, 바이러스가 없는 것을 기밀로 유지하였다. 이 내용은 국가가 전체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소수자의 행복을 경시했는지를 보려주는 한 예에 불과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 초반부에 검문을 담당하는 공무원에게 돈을 주고 무사히 통과하는 모습이나, 미국에게 대 세균전 무기인 '에이전트 옐로우' 실험 기회까지 주는 에피소드에서는 자주성과 책임감마저 상실한 역설적 발현체로서의 괴물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괴물의 속뜻은 벤담의 공리주의를 상기시킨다. 그는 『도덕 및 입법의 제원리』에서

개인생활의 목표는 행복이고 개인의 기계적 총화인 사회에 있어 행복은 최대 다수가 그것을 향수(享受)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마을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벤담의 주장에는 최대다수가 쾌락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소수는 항상 불행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짙게 배어있다. 즉, 공리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사회적 정의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소수의 희생을 전제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정의감과는 매우 소원하다.


 예컨대 칸트는 다음과 같은 철학이론을 제시하였다.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이는 우리로 하여금 행위를 할 때 항상 보편적 입장에 설 것을 요구하고, 도덕적 원리는 보편적 타당성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칸트의 이러한 보편주의의 밑바탕에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인격체로서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이념이 깔려있다. 이로부터 그는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는 정언명령을 제시하고 있다. 즉, 사람을 대할 때 수단이 아닌 사람 그대로의 인격으로 대우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다시 ‘괴물’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위의 장면들은 한국사회가 공리주의의 함정에 빠져, 지켜야할 근본적인 가치마저 지키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감독을 비롯한 여러 스태프들은 이 영화를 통해 단순히 오락적인 측면이 아닌 사회적 측면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로 인해 실제 괴물이 나오는 SF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다분히 사회문제적인 색체와 잘 다듬어진 스토리구조를 가져왔다. 괴물에서 나오는 집단에 의한 개인의 격리, 무능한 정부 아래 가족들의 고군분투(孤軍奮鬪) 그리고 이를 통해 점차 아버지의 역할을 배워가는 강두의 모습 등이 이 영화의 기본적인 내러티브구조라 할 수 있다. 또한 가족들의 대사 속에서도 제작진의 의도를 확인 할 수 있는데, 이는 이 시대가 회복해야 할 약자에 대한 가치를 하고 하기 위해서이다. 요컨대 ‘괴물’은 약한 사람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 의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에서 언어가 다양한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가 말한 오성(五性)으로서의 주관성을 언어적인 능력으로 보고 있다. 이는 변별적인 자질을 지닌 인격체 간의 차이와 대립을 통해 형성된 ‘랑그’라는 보편적 체계에 준거한 규칙을 공유하게 되면서, 개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괴물’에서 감독은 다양한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청자들과 암묵적으로 준거된 규칙에 대한 통찰을 요구한다는 것은 이미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 영화는 강두와 괴물을 각기 사회적 약자와 외부충격으로 등치시킨 후, 강두의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관객에게 유의미한 존재로 다가오고, 관객은 사회에 있는 진정한 괴물과 접하게 된다.


영화 마지막부분에서 강두는 머리 염색을 없애고 끊임없이 자던 인물에서 추운겨울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이는 강두가 ‘피보호인’에서 ‘보호인’으로 변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강두를 그러한 존재로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인가? 이를테면 강두가 한강에서 살아남은 아이와 밥을 먹는 마지막 장면에서 뉴스는 ‘바이러스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그러한 원인은 잘못된 정보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내용을 언급한다. 결국 강두는 국가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의 행복을 박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켜주는 것은 자신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여기에서 감독은 상징적 질서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보편적 체계에 근거한 규칙. 즉,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역할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던진 것이다.


3. 더 나은 세계를 위한 격정


 물론 이러한 분석이 ‘괴물’의 전체는 아님을 말할 필요도 없다. 괴물은 2000년대의 한국영화의 일반적인 투자-배급시스템 속에서 관객 동원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다. SF라는 화려한 포장 속에 과거 봉준호 감독 작품에 비해 다분히 적은 양의 사회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흥행에 부합하는 형태라는 것도 분명하다. 예컨대 봉준호 감독은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 영화에 대해 혹자들은 반미나, 혹은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작품을 만들면서 그런 것들만 고려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 한강에서 괴물이 나오는 영화를 구상한 사람이라면, 맥팔랜드 사건을 쉽게 지나칠 수 없을 것입니다. 환경단체에서 들으면 펄쩍 뛸 일이지만, 나는 신문을 보면서 바로 시나리오에 대입할 수 있겠다며 좋아할 정도였습니다. ‘고질라’ 같은 영화에도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원인으로 제공되지 않습니까. 그런 사건들은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장르의 강력한 출발점이 된다. 그 밖에도 괴물에게 있는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한 화학약품의 이름인 에이전트 옐로우는 고엽제를 말하는 에이전트 오렌지에서 따온 말이고, 괴물로 인한 바이러스가 없다는 영화 속 미군의 대사, ‘노 바이러스’는 누구나 짐작하듯 이라크전 이후, 살상무기가 사실은 없었다는 미국의 발표를 연상시킨다. 그런 것들은 이미 상식적으로 알려진 것들이고, 그게 시나리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뿐입니다. 잔돈을 뜯어가는 공무원, 가진 것 없는 애들의 진을 빼먹는 흥신소 애들, 이상한 캐릭터의 경찰 등 여러 풍자의 층이 있고 반미나 국가에 대한 비판은 그중 일부분일 뿐입니다. 물론, 유난히 비중있게 그려진 것 또한 사실입니다만…(후략)”


 간단히 말하면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작은 격정이다. 그리고 일반 관객에게 국가와 전체(unity)라는 것에 대한 짧은 단상을 통해 깊은 통찰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영화에서 보듯 사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냉혹하기 그지없다. 특히 엔딩에서 보듯 강두는 이제 자신 스스로 지켜야 함을 자각하는 장면이 이 영화를 슬프게 만든다. 영화의 문맥에서 강두의 가족을 비극으로 치닫게 하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그들을 지켜줘야 할 ‘국가’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더 나은 세계는 불가능한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 또한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 초반, 합동분양소에서 희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서야 니 덕에 우리가 다 모였다. 니 덕에...(후략)”


 여기에는 가족의 죽음이나 사진으로 밖에는 모일 수 없는 기초 공동체의 해체에 대한 아쉬움이 투영되어있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강두는 가족의 수배전단을 붙여놓고 있는데, 이는 영화 초반의 가족의 해체가 끝내 극복되지 못한 아쉬움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공통의 진리를 회복하는 것이 ‘괴물’이 갖고 있는 의미인 것이다. 이에 입각하여 공통의 진리는 각종 난관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근원의 힘을 제공한다. 희봉의 자식에 대한 부정(父情)과 강두의 부정(父情)이 그러했다. 그러나 이런 공통의 진리는 상대주의의 등장과 후기자본주의와 맞물려 점차 퇴색되고 있다. 또한 이 영화는 절대가치의 회복이 소수자들의 사회적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요소임을 전달한다. 칸트가 말한 보편적 원리의 회복이 지금보다 풍요로운 사회로 만들어가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괴물’은 이러한 사실을 사회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by 꿈꾸는소년 | 2008/12/21 01:00 | Daily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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